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옻골마을

중경의 깔/일상여행_색깔

by 중경(中景) 2020. 5. 12. 07:00

본문



처음 마을에 진입할 때 가장 먼저 시선을 잡던 정려각에는

백불암 최흥원의 효행을 기리는 왕의 교지가 모셔져 있다. 정려(旌閭)는

유교의 가치를 지켜 낸 충신이나 효자에게 왕이 내리는 것이다.









생시의 부모에 대한 효성과 나라를 경영할 정도의 경륜으로 大孝(대효)라 칭송받으며 死後(사후)

나라에서 正祖(정조)임금이 소수 홍패를 만들어 旌閭閣(정려각)을 세우고 큰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 최흥원 정려각(崔興遠 旌閭閣)


둔산동 옻골마을 중간에 위치한 이 건물은 조선 후기 영남의 대학자 이자 효를 위한 덕목을 정하고 부모의

병을 극진히 돌보는 등 효행으로 유명하였던 백불암 최흥원(百拂庵 崔興遠)을 기리기 위해 1789년에 조정의 명으로 세운 것이다.


최흥원은 둔산동 옻골마을 입향조인 대암 최동집(臺巖 崔東集)의 5대손으로 1705년에 태어나 82세를 사는 동안

평생 학문에 정진하면서 130여명의 많은 제자를 기르며 향약을 실시하는 등 백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남야 박손경(南野 朴遜慶)과 더불어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추앙을 받으며 당대 영남 퇴계 학맥을 이끌었다.


1784년에는 정조의 첫째 아들이었던 문효세자의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이 되어 스승이 되었다.

정려각은 단순한 구조로 벽면 상부에 홍살문이 설치된 1칸의 비각을 중심으로 주위에 토석담장이 네모꼴로 둘러져 있다.
최흥원정려각은 규모는 작으나 18세기 후반 건축양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백불암 고택(百拂庵 古宅)_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大邱 屯山洞 慶州崔氏 宗宅)/중요민속문화재 제261호


조선 인조 때의 학자 대암 최동집이 1616년 옻골에 정착하면서 그 이후에 지은 집으로, 대구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중 가장 오래되었다.
1630년에 지은 안채와 원래 백불암 최흥원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동산서원이 1868년 훼철되면서 그 자제를 사용하여 다시 지은

사랑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진 보본당과 포사, 그리고 불천위 사당인 벌묘와 가묘 등이 있다.

현재 보본당, 포사 그리고 벌묘와 가묘가 보수공사 중이라 자료사진은 담아오지 못했습니다.

(☞https://www.idaegu.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7093)


생활 공간의 오른쪽에 있는 보본당 뒤편에 있는 2동의 사당 중 벌묘는 최동집의 위패를, 가묘는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최흥원의 위패와 종손의 4대 봉사위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살림채와 재실 사당 등 많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은 조선시대 양반주택과 그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불고택의 평면도







백불고택의 사랑채_약간만 손을 보면 훨씬 곧게 쓸 수 있는 나무지만,

자연스러운 모양 그대로 사랑채 대청에 대들보를 걸었다. 한국의 미에 닿아 있는 모습이다.






현판은 백불암의 9대 종손인 최진돈(崔晉惇, 1947년생) 씨의 부친인 8대 백헌(白軒) 최병찬(崔秉瓚)의 글씨라고 한다.





백불고택의 주춧돌을 보면 안채에는 자연석을 썼고, 사랑채에는 다듬돌을 썼다.
자연석은 자연 상태니 울퉁불퉁하겠지만, 이 다듬은 돌이라는 것도 다듬다 만 듯한 모양이다.
모양도 제각각이고 말끔하게 정리된 느낌도 들지 않는다. 정성껏 다듬고 깎아 만든 기둥을 왜 저 못난 돌에 얹는 것일까?
머리로만 생각하면 쉽게 답을 찾지 못한다. 그저 그 앞에 서서 느껴야만 깨달을 수 있다.


다듬다 만 듯한 주춧돌이 눈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그로 인해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채는 훨씬 아름다운 자연미에 다다른다.
그런 자연스러움은 대청의 대들보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곧게 쭉 뻗은 나무가 더 좋을 법한데도 대충 손에 잡히는 나무를
대들보로 쓴 듯하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나쁘지 않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오래 두고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백불고택의 아름다움은 한국의 미에 바로 닿아 있다.

곧은 나무를 세우고 눕혀 쓰는 것이 쉽지, 휘어진 나무로 들보와 기둥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더 어렵다. 언뜻 대충 한 듯하지만, 대충 했다고 할 수도 없다.





▲사랑채의 주춧돌은 다듬돌로 사용하였다.







조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후손들은 숭모각(崇慕閣)을 세워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있는 정원에도 봄의 향기가 가득하였습니다.













▲안채


한옥의 아름다움 중에서 첫 번째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지붕 선을 꼽는다.
백불고택의 안채지붕 선을 만들 때 목수는 아마도 주변의 높은 산세를 담아내려 애썼을 것이다.

때로 지붕 선만으로 자연을 담아내지 못하면, 지붕이 더 높아지거나 낮아지기도 한다.
대충 하는 듯하지만,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한옥의 아름다움이다.






▲안채의 주춧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담장이 문틀까지 따라온 모습이 이색적이다. 흙으로 빚어 올린 마을의 담장이 대문에까지 곧게

연결되어 담장의 질감이 자연스럽게 대문으로 이어진다. 대문에서 느껴지는 예스러움과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사랑채의 고풍스러움이 이 때문에 더 진하게 묻어난다.







▲사당_백불고택(百弗古宅)의 사당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린다. 사당 건물이 주는 알 수 없는 느낌 때문이다.
담장 위로 솟은 사당은 단정한 모습이다. 그러나 단정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무언가 모자란다. 분명 다른 느낌이 또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잡히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당 정면에서 보이는 산 정상에 자리잡은 대암(원안)의 기운 때문이 아닐까요?







수구당(數咎當)_대구문화재자료 제41호


이 건물은 백불암 최흥원이 제자들과 강학하던 곳이었는데 후에 자손들의 살림집으로 개조되면서 사랑채와 안채

2동만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건립 당시 안채는 기와가 얹혀진 와가였던 반면 사랑채는 초가지붕을 갖추고 있었다.







光堂精舍(광당정사)_ '빛이 가득한 집'이란 뜻의 당시의 강학당 현판이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1918년에 두 건물을 고쳐 지으면서 안채는 칸수를 늘리고 기둥을 높였으며, 사랑채에는 새로 기와를 올렸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중앙에 개방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다양한 공간이 구성되었는데, 안채에는 2개의 방과 부엌이,

사랑채에는 사랑방과 침방을 두었다. 수구당은 안채와 사랑채만이 갖춰진 단순한 구조이지만, 조선 말기

대구지방의 양반집 살림채 형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는 안채






























동계정(東溪亭)_대구문화재자료 제45호


옻골마을의 동쪽에 위치한 이 정자는 백불암 최흥원의 아들인 동계 최주진(동계 최주진)을 기리기 위해서

1868년 훼철되었던 동산서원의 자재를 사용하여 1910년에 세운 것으로, 최주진의 호를 따라 동계정으로 이름을 지었다.





 


東溪亭(동계정)의 전서체 현판은 미수 허목(許穆))선생의 글씨라 합니다.





정자의 용도는 주로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동계정은 옻골마을에 있는 수구당, 보본당과 달리 대칭이 중심에 위치하지 않고 가장 왼쪽에 위치하여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건물은 건축양식이나 공간의 구성이 조선 후기의 정자와 비교하여 부재의 크기가 작아지고 구조를 이루는 방법 등이

간결해져 근대기의 특성이 강한 편이지만, 조선 말기에서 근대기로 넘어가는 건축양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동계정은 언뜻 단출해 보이지만, 건물 주변을 아우르는 건축적 안목이 뛰어나고 담장

높이를 조절하여 건물 안에 앉은 이의 시선을 막고 여는 능숙함도 갖춘 꽤 잘 지어진 건축물이다.




▲동계천에서 동계정으로 오르는 계단은 담을 끊어 문을 만들었다.




in



둔산동 옻골마을


옻골마을은 제가 10여년 전에 한번 다녀 갔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 옛스러운 풍경들이었는데

개발로 인해 많이 변해가고 있어서 안타까웠습니다.


봄 풍경만 살짝 담아갈려고 했었는데..

다음에 오면 마을이 많이 변해 있을 것 같아

기록을 남기는 의미에서 옻골마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즐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중경의 깔 > 일상여행_색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투티  (0) 2020.05.27
완재정(宛在亭)  (0) 2020.05.26
옻골의 봄  (0) 2020.05.11
마을의 담장  (0) 2020.05.08
소원등  (0) 2020.05.07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