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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_Kreuzen

중경의 깔/공연전시_맛깔

by 중경(中景) 2019. 10. 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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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미술관에서는 대구 출신으로 회화, 영상, 설치 등 장르를 넘나들며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박종규(b.1966)작가의 전시를 개최한다. 박종규 작가는 2009년부터 디지털 이미지의 기본단위인 픽셀에서 추출한 점과 선으로

'노이즈'를 구현하여<Layers and Dimension>등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다양한 층위의 관점과 차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왔다.


2015년부터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 통일된 시리즈의 제목을 부여하고 있으며 2015년<Encoding(암호화하다)>,

2016년<Maze of onlookers(미궁)>, 2017-2018년<Embodiment(구현)>라는 하나로 연결되는 맥락의 시리즈를 진행 해오고 있다.


2019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제목 <~Kreuzen(크루젠)>은, '순항하다'라는 뜻의 독일어이다.
이전 시리즈가 모색과 실현의 시기였다면 2019년 시리즈 <~Kreuzen(크루젠)>은 작가의 예술세계의 순항을 기원하며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노이즈'는 보통 '소음, 잡음'을 뜻하며 현대음악에서는 '배제된 것' 또는 '제외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전위적인 전자 음악가들에게 노이즈는 규칙을 벗어나 실험적 작품을 하는 하나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박종규의 작업에서 '노이즈'역시 배제된 것을 의미하는데, 모더니즘 미술에서 소외된 '시각적 노이즈'를 화면에

주요한 구성요소로 등장시킨다. 배제되고 소외된 것이 화면에 주요하게 드러나면서 박종규의 작품은 옳고 그름,

흑과 백 등 이항 대립적 틀을 해체하며 인식과 판단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체계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사회 속에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어왔던 것은 진짜로 믿을만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작가는 감각적인 디지털 이미지로 관람객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전작 모두 2019년 신작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시각적으로 구현된 다양한 노이즈의 차원을 느낄 수 있다.

공간과 감각의 무한한 층위를 넘나드는 박종규 작가의 이번 전시는 우리는 감각적 혼란으로 이끌며 이를 통해 삶을 성찰하게끔 한다.












▲~Kreuzen, 2019, 합판, LED전등, 1400×360cm


박종규는 회화로 시작된 '노이즈'시리즈를 점차 다양한 매체로 확대해오고 있다.
전시장 입구 전면의 타공벽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은 회화작품의 물성과 공간적 차원의 구현이라고 볼 수 있다.
벽면을 가들매운 구멍과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움직이는 불빛들은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별빛 같기도 하다.
잡을 수 없는 빛이 쏟아져 내리는 상황은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동시에 미지에 대한 불가사의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회화의 공간적 구현은 시각 뿐 아니라 오감을 활용하여 몸으로 느껴지는 '노이즈'를 선사한다.

또한 이 작품은 노이즈는 함께 설치되어 있는 얼굴이 나오는 영상 위로 오버랩되며
작품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다양한 층위가 중첩되어 감각의 지평을 확장한다.














▲~Kreuzen, 2019, 3채널비디오, LED모니터, 2개의 프로젝터, 사운드, 4분40초, 가변크기


2019년 신작이며, 대구미술관에서 처음 선보이는 이 작품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은 무엇인가?.'

 '미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를 일반인에게 질문하는 영상이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답은 영상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영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장에서 보여진다. 먼저 천장에 실치된 LED모듈 모니터는 인터뷰이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보여주고 있어 형체를 정확히 알아볼 수 없으며, 말과 말이 섞여서 '노이즈'처럼 들려오는 사운드는 명확한 문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또한 바닥에는 거울이 간헐적으로 설치되어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준다.
반면 양 옆의 대형스크린은 각각 일그러진 얼굴과 올바른 얼굴이 보여지는 원본 영상이 함께 상영되고 있다.

 올바른 얼굴과 목소리는 작가에 의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대답을 들을 수 없게끔 바뀌었다.

 이로 인해 인터뷰이들이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것. 즉 그들의 답변-진실은 찾기가 어렵다.

이것은 외부에 의해 이분법적 논리로 쉽게 구분되는 우리의 인식체계 또는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우리는 4면의 공간에서 각기 나눠서 보여지는 얼굴과 노이즈를 보고 들으며 다시 한 번 물어본다.
어디가 진짜일까? 무엇이 진실일까? 작가는 이렇듯 인식의 혼돈을 유도하며

3차원의 감각으로 느끼는 '노이즈'의 세계로 관람객을 이끌고 있다.






▲~Kreuzen, 2019, 3채널 비디오 설치, 소리, 철제거울, 3분, 900×900cm


공간에 가득 차 있는 어둠 속으로 점과 선들이 날아다닌다. 시작과 끝이 모호한 점과 선들은 공간의 기준점 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무수히 많은 점과 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만 같다. 무엇이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내가 딛고 서 있는 바닥은 진짜인가? 의심하며 시간과 공간이 잠시 뒤집힌 것 같은 혼돈 속에서

작가의 '노이즈'는 실제로 구현되어 우리의 감각을 비튼다.






























▲~Kreuzen, 2019, 알루미늄 복합판넬 위에 UV프린트, 가변크기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과거-현재-미래로 당연하게 흐르는 시간과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공간과 시각이다.
이것은 선형(linear)적, 또는 연속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예측과 계획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 걸려있는

알루미늄 조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시작과 끝이 정해져있지 않은 작품은 보는 이의 시각을 혼란스럽게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시선과 크기는 좁은 공간에서 보기에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구성요소의 합이나 곱 등 선형 결합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의 '비선형(non-linearity)'조각이라
명명된 이 작품은 우리를 어지럽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작품이 지닌 깊은 의미체계이다.














































▲~Kreuzen, 2019, Painting series


미니멀하고 감각적인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회화 작품들은 마치 정규방송이 끝난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지지직'소리의 화면 같다. '지지직'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화면은 소리를 시각적으로 환원한 것 같은,무질서한 선들이 흔들리고 있다.


박종규의 회화는 바로 그런 '노이즈'를 보여주고 있다. 배제되거나 제외된 것, 소음 또는 잡음인 노이즈를 회화의

주요 모티브로 삼아 작품의 전면에 보여주고 있는 것은 소외된 것의 복권이자 이항 대립적 틀을 해체하는 것이다.

배제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이것은 사회 속에서 우리의 인식체계의 기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in..




대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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